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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홍성 역사인물축제 2018 홍성의 인물을 만나다

달빛 그리고 나그네 2018. 8. 18. 18:47


홍성 역사인물축제는 2018년 9월 14일부터 9월 16일까지 3일간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홍주성 일원에서 주제로 "홍주 1000년! 성삼문 600년! 역사의 시작!"을 가지고 홍성군 주최로 펼쳐진다. 홍성 역사인물축제에서 홍성의 인물들을 찾아 만나보고 홍성의 넉넉한 인심과 볼거리를 찾아 홍성으로 떠나보자. 충절의 인물들을 만나 나를 새롭게 하는 꿈을 이루어보자.

 

 

홍성은 충청남도 도청소재지로 과거의 이름은 '홍주목'이었으며 평택과 서천사이의 16개 군현을 통괄하여 다스리는 고장이었다. 충청 서해안을 아우르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수축산의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넉넉한 인심이 특히 아름다운 고장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홍성에는 고려의 마지막까지 충의를 지켜왔던 고려말의 명장 최영장군, 불의에 항거하여 굳건한 절개로 만천하에 그 이름을 떨친 성삼문, 일제에 항거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이신 한용운 선사, 청산리 전투의 승전보를 울렸던 김좌신 장군, 조선 춤의 대가이며 한국무용의 본류인 한성준 선생, 해외에서 더 유명한 현대미술가 이응노 선생을 배출한 역사 인물의 고장이다.

 

 

홍성 역사인물 축제의 행사내용에는 대표프로그램으로 최영 무과마을, 성삼문 한글마을, 한용운 독립마을, 김좌진 독립군 마을, 한성준 전통춤 마을, 이응노 미술마을, 역사인물 캐릭터 체험, 전래놀이 체험, 역사인물 보드게임 등이 있으며 부대행사로 거북이 마당 놀이, 개막식 및 역사인물 주제극, 역사인물 미디어 퍼포먼스, 청소년 가요페스티벌 등이 마련된다.

 

 

최영은 무민공으로 1316~1388, 고려의 명장으로 1352년에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1358년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 1359년 서경을 함락한 홍건적격파, 1361년 개경을 한락한 홍건적을 1362년에 개격을 수복하였다. 1367년 왜구가 침입하자 옹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1378년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에 에속 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요동 정벌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성게의 위화동 회군으로 실패를 하고 말았다. 

 

 

성삼문은 매죽헌으로 1418~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표적인 절신으로 꼽힌다.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으며 요동으로 13차례나 왕래하며 전확한 음운을 배워오고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멸문의 참화를 당하였다.

 

 

한용운은 만해로 1876~1944,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고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조선불교유신 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을 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엿으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 되어 서대룸 형무소 수감 중 '독립의 서;를 썼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 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지조가 곧고 절개가 있어 일제와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김좌진은 백야로 1889~1930,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71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섬여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독립군을 양성하고 31세가 되던 해에 시베리아로 출전 중이던 일본군 3,000여 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1,200여 명을 전상자로 만든 7일간의 전투가 바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대승을 이룬 1920년 10월 21일의 청산리 전투이다. 대일항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한성준은 1875~1941, 1879년부터 민속무용과 줄타기로 유명했던 조부 백운채에게 춤과 장단학습이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7살때부터 '승무'를 공부하고 8살부터 여러 잔치 행사에 출연하여 천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1881년 무렵에는 홍패사령을 따라 다니며 줄을 타거나 재주를 부렸고 14세가 되면서는 홍성골 서학조에게 줄과 재주를 3년간 배웠다. 1938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40여가지에 달하는 전통춤을 재구성하고 집대성하여 학무, 살풀이춤, 태평무, 사자무, 신선무, 동자무, 아리앙무 등 20여 종목으로 발표회를 하였다.

 

 

이응노는 고암으로 1904~1989, 21세인 1924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이후 일제시대에 이 전람회에서 여러차례 수상하였다. 일본 유학을 거쳐 해방후에는 새로 개설된 홍익대학교 미술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50대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으며, 이응노는 한국의 전통 서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선보여 유럽 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학교를 세우고 서구 젊은이들에게 동양의 예술을 가르쳤다. 그가 남긴 3만여점의 작품은 전통서화부터 현대의 추상에 이르기 까지 매우 폭넓고 다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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